고후카쿠사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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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후카쿠사 천황은 1243년에 태어나 1246년에 4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260년 동생인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한 일본의 제89대 천황이다. 재위 기간 동안 부황인 고사가 상황이 인세이를 행하여 직접 정무를 보지는 못했다. 이후 고후카쿠사 천황의 혈통인 지묘인 왕통과 가메야마 천황의 혈통인 다이카쿠지 왕통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고후카쿠사 천황은 인세이를 통해 자신의 아들인 후시미 천황을 즉위시키며 지묘인 왕통의 번영에 힘썼다. 1304년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능묘는 교토시 후시미구에 있는 깊은풀 북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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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간겐(寛元) 원년(1243년) 6월, 외할아버지 태정대신(太政大臣) 사이온지 사네우지(西園寺実氏)의 이마데가와 저택(今出川邸第)에서 태어나, 생후 두 달 만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간겐(寛元) 4년(1246년) 정월, 고사 천황의 양위로 4세(만 2세)에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 재위 중에는 고사가 상황이 원정을 행하여 직접 정무를 보는 일은 없었고, 재위 기간 내내 권력은 상황인 아버지 고사 천황에게 있었다.
쇼겐(正元) 원년(1259년)에 학질을 앓아 11월에 고사가 상황의 요청으로 17세의 동생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에게 양위하였다.
분에이 5년(1268년) 고사가인의 지시로 고후카쿠사 천황의 아들 히로히토가 아닌 요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세워졌다. 이때부터 고후카쿠사 천황의 혈통(지묘인 왕통)과 가메야마 천황의 혈통(다이카쿠지 왕통)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쇼오 3년(1290년) 출가하여 법명을 소시쓰(素実)라 하였다. 공식적인 원정은 그만두었지만, 그 후로도 정치에 관여하여 지묘인 왕통을 중심으로 그 번영에 힘썼다.
가겐(嘉元) 2년(1304년)에 레이제이 도미코지도노(冷泉富小路殿)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62세였다.
한편 고후카쿠사 천황은 어려서 센요몬인(宣陽門院)의 양자가 되어 겐초(建長) 3년(1251년)에 그 소유 영지인 장강당령(長講堂領)을 양도받았다. 당초 이들 장원도 인세이를 펴고 있던 아버지 고사가인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분에이 4년(1267년) 고사가인이 출가하기에 앞서서 장강당령 일체의 권리를 고후카쿠사인에게 양도하였다. 이후 고후카쿠사인의 자손인 지묘인 왕통의 천황들이 이를 물려받았으며, 지묘인 왕통의 주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2. 1. 출생과 즉위
간겐 원년(1243년) 6월, 외할아버지 태정대신 사네우지의 이마데가와 저택에서 태어나, 생후 두 달 만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3] 1246년 정월, 고사 천황의 양위로 세는 나이 4세(만 2세)에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5] 재위 기간에는 고사 상황이 원정을 행하여 직접 정무를 보지 않았다.쇼겐 원년(1259년)에 학질을 앓아, 같은 해 11월에 고사 상황의 요청으로 17세의 동생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하였다.
2. 2. 어린 천황과 인세이
간겐 원년(1243년) 6월에 외할아버지 태정대신 사네우지의 이마테가와 저택에서 태어나, 생후 두 달 만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간겐 4년(1246년) 정월, 고사 천황의 양위로 네 살(만 나이 두 살)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에는 고사가 상황이 원정을 베풀었기에 직접 정무를 보지는 않았다. 쇼겐 원년(1259년)에 학질에 걸렸고, 같은 해 11월 고사가 상황의 요청으로 17세에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하였다.분에이 5년(1268년)에 고사가 상황의 지시에 따라, 연장자인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 히토히토 친왕을 제치고 가메야마 천황의 황자 세닌 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것으로부터 고후카쿠사 상황의 혈통(지묘인통)과 가메야마 천황의 혈통(다이카쿠지 왕통)의 대립이 시작되었다.[4] 같은 해 9년(1272년), 고사가 법황이 치천과 황위 결정권에 대해 모든 것을 가마쿠라 막부에 위임하는 형태로 붕어하자, 막부는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 형제 중 누구를 결정할 수 없어 두 사람의 모후인 오미야인에게 자문하여, 법황의 본뜻이 가메야마 천황의 친정에 있다는 답변을 얻고 가메야마 친정이 결정되었다. 2년 후인 분에이 11년(1274년) 1월, 가메야마 천황은 고우다 천황에게 양위하고 치천의 군으로서 원정을 시작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고후카쿠사 상황은 이듬해 겐지 원년(1275년)에 상황의 존호 사퇴와 출가의 의사를 표명하였고, 당시 간토신차로 고후카쿠사 상황 측인 사이온지 사네카네(오미야인의 조카)이 싯켄 호조 도키무네와 교섭하여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 히토히토 친왕을 같은 해 안에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였다.[4]
고안 3년(1280년) 무렵부터 고후카쿠사 상황 측에 의한 고우다 천황 퇴위와 황태자 옹립 움직임이 강해져, 고안 10년(1287년) 10월, 나이칸레이 타이라노 요리츠나가 주도하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히토히토 친왕(후시미 천황)이 즉위하면서 고후카쿠사 상황이 원정을 시작하였다. 쇼오 2년(1289년) 4월에는 후시미 천황의 황자 이네히토 친왕(고후시미 천황)이 두 살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10월에는 여섯 번째 황자 히사아키 친왕을 가마쿠라 쇼군으로 파견하는 등, 그 후 한동안 지묘인통에 유리한 체제가 계속되었다.
2. 3. 지묘인 왕통과 다이카쿠지 왕통의 대립
간겐(寛元) 원년(1243년) 6월, 외할아버지 태정대신(太政大臣) 사이온지 사네우지(西園寺実氏)의 이마데가와 저택(今出川邸第)에서 태어나, 생후 두 달 만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간겐(寛元) 4년(1246년) 정월, 고사가 천황의 양위로 네 살(만 2세)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에는 고사가 상황이 원정을 행하여 직접 정무를 보지는 않았다. 재위 기간 내내 권력은 상황인 아버지 고사가 천황에게 있었다.쇼겐(正元) 원년(1259년)에 학질을 앓아 같은 해 11월, 고사가 상황의 요청으로 17세의 동생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에게 양위하였다.
분에이 5년(1268년), 고사가인의 지시로 고후카쿠사 천황의 아들 히로히토가 아닌 요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세워졌다. 이때부터 고후카쿠사 천황의 혈통(지묘인 왕통)과 가메야마 천황의 혈통(다이카쿠지 왕통)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분에이 9년(1272년), 고사가 천황이 치천의 군 지위와 왕위 결정권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에 위임하는 형태로 승하하였다.
막부는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 형제 중 누구를 결정할지 못하고 두 사람의 모후인 오미야인(大宮院)에게 자문했고, 오미야인(大宮院)은 고사가인의 본뜻은 가메야마 천황의 친정에 있었다고 답하였다. 2년 뒤인 분에이 11년(1274년) 1월, 가메야마 천황은 아들 요히토 친왕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나 자신이 치천의 군으로서 원정을 시작하였다. 이에 고후카쿠사 상황은 불만을 품고 이듬해인 겐지(建治) 원년(1275년) 태상천황 존호를 사퇴하고 출가할 뜻을 밝혔다.
당시 간토 신차(関東申次)로 고후카쿠사 상황을 지지하던 사이온지 사네카네(西園寺実兼)는 당시 싯켄(執権)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와 협상, 절충 끝에 고후카쿠사 상황의 아들 히로히토 친왕을 그해 안에 황태자로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고안(弘安) 3년(1280년) 무렵부터 고후카쿠사 상황 측에 의한 고우다 천황 퇴위와 황태자 양위 움직임이 강해졌고, 고안(弘安) 10년(1287년) 10월, 고우다 천황이 자신의 아들이 아닌 히로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 고후카쿠사 상황은 히로히토 친왕의 즉위와 함께 원정을 시작하였다. 쇼오(正応) 2년(1289년) 10월, 여섯째 아들 히사아키 친왕(久明親王)을 가마쿠라 막부의 8대 쇼군으로 내려보냈다. 이후 한동안 지묘인 왕통에 유리한 체제가 이어졌다.
2. 4. 출가와 정치 관여
쇼겐(正元) 원년(1259년)에 학질(瘧疾)을 앓아 고사 천황의 요청으로 동생인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하였다.[4][5]분에이 5년(1268년) 고사가인의 지시로 고후카쿠사 천황의 아들 히로히토(熈仁, 훗날의 후시미 천황)이 아닌 요히토 친왕(世仁親王, 훗날의 고우다 천황)이 태자로 세워졌다. 이때부터 고후카쿠사 천황의 혈통(지묘인 왕통)과 가메야마 천황의 혈통(다이카쿠지 왕통)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4] 분에이 9년(1272년) 고사가 천황이 치천의 군 지위와 왕위 결정권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에 위임하는 형태로 승하하였다.
막부는 고후카쿠사 상황, 가메야마 천황 형제 어느 쪽을 결정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모후인 오미야노인(大宮院)에게 자문을 구했고, 오미야노인은 고사가인의 본의는 가메야마 천황의 친정에 있었다고 답하여, 2년 뒤인 분에이 11년(1274년) 1월에 가메야마 천황은 아들 요히토 친왕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나 자신이 치천의 군으로서 인세이(院政)를 시작하였다. 이에 고후카쿠사 상황은 불만을 품고 이듬해인 겐지 원년(1275년) 태상천황의 존호를 사퇴하고 출가할 뜻을 밝혔다.
당시의 간토 신차(関東申次)로 고후카쿠사 상황을 지지하던 사이온지 사네카네는 당시의 싯켄(執権) 호조 도키무네와 협상, 절충 끝에 고후카쿠사 상황의 아들인 히로히토 친왕을 그 해를 넘기기 전에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하였고,[4] 결국 고안 3년(1280년) 무렵부터 고후카쿠사 상황측에 의한 고우다 천황 퇴위와 황태자 양위 움직임이 강해져서, 고안 10년(1287년) 10월 고우다 천황이 자신의 아들이 아닌 히로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 고후카쿠사 천황은 히로히토 친왕의 즉위와 함께 인세이를 시작하였다. 쇼오(正応) 2년(1289년) 10월에는 여섯째 아들 히사아키 친왕을 가마쿠라 막부의 8대 쇼군으로 내려 보냈다. 이렇게 해서 그 뒤 한동안 지묘인 왕통에 유리한 체제가 이어졌다.
고후카쿠사 천황은 쇼오 3년(1290년) 출가해 승려가 되어 법휘를 소시쓰(素実)라 하였다. 공식적인 인세이는 그만두었지만 그 후로도 정치에 관여하여 지묘인 왕통을 중심으로 그 번영에 힘썼다.[4]
가겐(嘉元) 2년(1304년)에 레이제이 도미코지도노(冷泉富小路殿)에서 승하하였다.
3. 가계도
4. 연호
고후카쿠사 천황의 재위 기간은 아래의 연호(年號) 혹은 ''넨고''(nengō)로 더 구체적으로 구분된다.[6]
5. 평가 및 영향
고후카쿠사 천황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버지 고사가 상황의 섭정 아래 있었습니다. 고사가 상황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동생인 가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후카쿠사 천황의 혈통(지묘인 왕통)과 가메야마 천황의 혈통(다이카쿠지 왕통)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습니다.[4]
고후카쿠사 천황은 자신의 아들(훗날의 후시미 천황)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와 교섭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묘인 왕통에 유리한 체제가 이어졌고, 그의 후손과 다이카쿠지 왕통의 후손이 번갈아 즉위하는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4]
또한 고후카쿠사 천황은 장강당령(長講堂領)을 양도받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는 지묘인 왕통의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6. 능묘
고후카쿠사 천황의 릉(みささぎ)은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깊은풀방정(深草坊町)에 있는 깊은풀 북릉(ふかくさきたのみささぎ)으로 지정되어 있다.[7] 궁내청 상의 형식은 방형당이다. 깊은풀 북릉에는 지명원통 역대 천황이 묻혀 있으며, “깊은풀 십이제릉”이라고도 불린다.
깊은풀 산중에 묻힌 것은 고후카쿠사 천황의 생전 소원이었다고 한다.
또한 황거에서는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과 황족들과 함께 고후카쿠사 천황의 영이 봉안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2]
서적
Jinnō Shōtōki
1980
[3]
서적
[4]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Japan
Kodansha
1999
[5]
서적
[6]
서적
[7]
웹사이트
https://biz-journal.jp/journalism/post_27062.html
https://biz-journal.[...]
サイゾー
2019-06-02
[8]
문서
和長卿記
[9]
문서
실제로는 4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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